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덕숭총림 수덕사

덕숭산의 정기를 이은 천년의 아름다운 사찰
덕숭총림 방장 초대방장

수덕사
바로가기

초대방장

경허鏡虛 만공滿空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선풍을 계승한 선사이다.

초대방장

현문스님의 속명은 순천順天, 법호는 惠庵이다.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강릉 최씨인 최사홍崔四弘과 전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7년 출가하여 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보암保庵을 은사恩師로, 금운錦雲을 계사戒師로 하여 15세에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전국의 이름있는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운수행각을 하다가 1929년 수덕사 조실 만공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덕숭산에 머무르면서 3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84년 100세의 나이로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여하여 우리나라의 선을 미국에 전파하고 , 그해 말에 설립된 덕숭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다. 1985년 수덕사 염화실에서 나이 101세, 법랍 89세로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선문법요禪門法要] [선문촬요편저禪門撮要編著] 가 있고, 문하에는 대의 大義 ,법우 法雨 등의 제자들이 있다.
혜암현문 선사는 조선 말기 대선지식인 경허, 만공 선사로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선풍을 계승했다. 스님의 속명은 순천(順天), 법호는 혜암이다. 황해도 백천(百川)에서 강릉 최시인 최사홍(崔四弘)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11세때 부친상을 당하여 출가를 결심, 1897년 1911년 27세에 해담(海曇)을 계사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성월 스님 화상에서 정진하며 화두를 간택 받았다. 이후 전국의 이름 있는 고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하안거를 시작으로 만공, 혜월, 용성 선사를 모시고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語默動靜句 個中唯敢着 問我動靜離 卽破器相從

어묵동정 한 마디 글귀를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 나에게 묻는다면 침묵도, 움직임도 않음도 여의고 한 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저절로 맞추지 못하리라 하리라.

그러기를 6년 오도의 경지를 확연히 맛보았다. 이 무렵 묘향산 상원사 주지와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淨岩寺) 주지를 잠간씩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29년 45세 대 수덕사 조실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을 받았다.

示慧庵玄門禪子 혜암 현문 선자에게 보이다.

雲山無同別 亦無大家風 如是珷文咽 分付慧庵與 世尊應化
二九五六年 己巳年 二月 初七日 鏡虛門人 滿空月面 稿

구름과 산은 같고 다름이 없고 대가의 가풍도 또한 없어라 이와 같은 글자의 인을 혜암 너에게 주노라.

1943년 어느 날 만공과 혜암은 서산 간월도로 가는 배 이에 올라, 법담을 나누었다. 만공이 혜암에게 물었다. “저 산이 가는가, 이 배가 가는 것인가?” “산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는가?”라고 재차 물어오는 만공의 질문에 혜암은 손수건을 말없이 들어 보이자 만공은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자네 살림살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되었던가.” 스님은 1956년 72세 대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덕숭산에 머물면서 3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했다. 또한 한국 전통선의 진수를 전하려는 스님의 집념은 마침내 해외포교를 염원하게 되어 1984년 100세의 나이로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석, 우리 나라의 선을 미국에 전파하는 값진 역할을 했다. 그 해 말에 설립된 덕숭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었다. 1985년 수덕사 염화실에서 나이 101세, 법랍 89세로 입적했다. 저술로는 76년 스님의 법어를 모아 엮은 <선문법요(禪門法要)>와 직접 편역한 <선문촬요(禪門撮要)>가 있고, 문인 묘봉 스님의 영역으로 발행한 <선문촬요>등이 있으며, 법어집 <조사선에로의 길 Gate way to Patriarchal Son>은 한영대역판으로 출판되었다. 문하에는 대의(大義), 법우(法雨) 등의 제자들이 있다.

혜암 스님은 깨달음을 인가 받은 뒤에도 정진을 늦추는 법이 없었다. 무섭도록 철저한 오후(悟後) 보림(補林)을 했다. 경허-만공의 법을 이은 그는 덕숭산의 가풍을 온전히 계승한 선사답게 독자적인 견성 체험을 통해 응집된 자신만의 오도적 세계를 구가했다. 그는 중국 선사들의 게송이나 송구를 인용하는데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목소리를 냈다. 1985년 수덕사에 총림이 설치되면서 초대방장을 맡았는데 납자제접과 선풍진작에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경허에 의해 발양된 한국선의 법통을 이은 혜암 스님은 독특한 덕숭가풍을 선양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참선 정진에 매진하면서도 선에 매몰되지 않았고, 명리와 재물을 멀리하는 바람직한 수행자상을 보여주었다. 또한 혜암 스님이 남긴 생애는 지극히 평범하고 진지하며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남긴 자취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평범한 것이었지만 선사의 생은 감동적인 향기가 흠씬 풍겼다.

100세가 넘도록 운수행각과 참선정진을 거듭해 온 혜암 선사는 만년에 자신의 일생을 간단히 이렇게 노래했다.

行狀衲衣一枝 東走西走走無窮 傍人若問何處走 天下橫行無不通

내 행장 누더기 한 벌과 주장자 한 개 동서로 달리기 끝없이 하였네 누가 만약 어디로 그렇게 달렸냐 하면 천하를 가로질러 통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