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덕숭총림 수덕사

덕숭산의 정기를 이은 천년의 아름다운 사찰
덕숭총림 경허만공선사 만공스님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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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스님

선禪의 중흥조인 경허鏡虛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 시킨 위대한 선지식이다.

만공 월면선사
만공 월면선사

스님의 속명은 도암 道 巖,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 이다.

전라북도 태인에서 부친 송신통 宋神通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3년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 金山寺에서 불상을 처음보고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 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 스님을 따라 서산천장사天藏寺로 와서 태허 泰虛 스님을 은사 恩師로 경허를 계사 戒師로 사미십계 沙彌十戒를 받고 법명을 월면 月面이라 하였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 金仙臺를 짓고수 년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 衲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 修德寺, 정혜사 定慧寺, 견성암 見性庵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 선학원 禪學院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 운동 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 총독 미나미南次郞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이는 일제 치하의 치욕스런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만공의 사상은 생사를 초탈한 선사의 가풍이라 할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전월사 轉月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 滿空塔을 세우고 진영 眞影을 경허. 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 하였다.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그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高峰, 금봉錦峰,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 벽초碧超, 원담圓潭 등과 비구니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등 당대에 뛰어난 제자들이 있다.

만공 월면선사
선학원에서 적음스님이 만공스님에게 입실건당할 당시 사진

만공월면(空 月面, 1871 ~ 1946) 선사는 고종 2년 1871년 음력 3월 7일 전북 태인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도암(道岩)이었고, 휘(諱)는 월면이며 法號는 만공이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신용(神龍)이 구슬을 토하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고, 두 살이 되던 해 그 아버지의 꿈에 한 노승이 찾아와 이 애를 데려다 큰 중을 만들겠다' 하여 보통 인물이 아님을 일찌감치 알려놓았다.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스님 나이 14세 되던 갑신년(1884)이었다. 그해 시월 초순 어느 날 스님은 자신의 사상과 생애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한국 선퐁의 중흥조이신 경허선사를 만나게 된다.
동학사에서 경허 스님을 만난 만공은 그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泰虛) 스님을 은사로, 경허선사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를 받고 득도했다.
그 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했다. 1895년 온양 봉곡사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라는 게송을 읊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다음은 오도송이다

  •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 빈산의 이치와 기운은 예와 지금의 밖에 있는데,
    흰 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가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네
만공 월면선사
1933. 8.30.~1935. 8.15. 금강산 마하연 주지 1935년 하안거 조실

그 뒤 스님은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보경스님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선사로부터 '아직 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의 無子話頭로 다시 參禪하도록 하라' 는 가르침을 받고 精進하였다. 그뒤 경허선사를 모시고 서산 부석사(浮石寺)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鷄鳴庵) 등지에서 수도하였다.
1910년 경허선사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 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범종을 치는 소리에 문득 재차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는 도중 1904년 함북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선사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고 "만공' 이란 법호와 함께 다음의 전법게를 받았다.

  • 雲月溪山處處同
    叟山禪子大家風
    慇懃分付無文印
    一段機權活眼中
  •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의 대 가풍이여
    은근히 무문인을 분부하노니
    한 조각 권세 기틀 안중에 살았구나. <甲長(1904) 二月 十一日>
만공 월면선사
정혜사

만공 스님은 1905년 이후 주로 예산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보림을 하는 동안 납자들을 제접했다. 1931년 유점사 금강선원 조실을 맡았으며 1933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다.
이 시기를 제외하고 스님은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만공스님은 1937년 3월 스님이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31본산 주지와 13도지사가 함께 모여 미나미(南次郞)의 주재 하에 불교진흥책을 논의했다. 이 때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이 단에 나아가,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승려를 본받아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한 뒤 정교분리론을 주장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만공 스님은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와 견성암(見性庵) 및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했고,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 운동( 禪友共濟會運動 )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1941년 서울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 초대되어 설법하고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고자 했다. 만공스님은 덕숭산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했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를 짓고 생활하다가 1946년 10월 20일 열반일을 미리 선견하시고 전월사에서 홀로 달을 굴리시다가 목욕 단죄하신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하시니 때는 병술년 1946년 음력 10월 21일이었다.
다비를 마친 후 영골(靈骨)을 모아 만공탑에 봉안하고 진영은 경허 선사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진영각)에 봉안하니 세수(世數) 75세요, 법랍은 62세이시다. 1927년 그가 지은 <현양매구 (懸羊買狗)> 라 는 글의 끝에 자신을 임제 32대 사문 만공(臨濟三十二代沙門滿空)이라고 밝히고 있어 그가 임제종풍을 계승한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공 스님은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걸출한 제자로는 비구 보월, 용음, 고봉, 서경, 혜암, 전강, 금오, 춘성 등과 비구니 법희, 만성, 일엽 등이 있다.

만공 월면선사
견성암

<滿空法語>

1권 1책의 법어집으로 1983년 문도인 惠庵, 碧超, 圓潭등이 간행했다. 권두에는 혜암이 쓴 봉향송과 경봉이 쓴 序辭, 원담의 간행사가 있다.
본문은 상당법어(上堂法語 ) 42편, 거랑(擧場) 57편, 序文 3편, 발원문(發願文) 3편, 기타 3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말에 자세한 행장이 있다. 이 중 상당법어에는 세간상상주( 世間相常住), 무상보리(無上菩提), 천안불간(千眼不看), 일심만상(一心萬像), 탄진삼세제불(呑盡三世諸佛) 등 불교와 선의 중요 문제에 대한 법문을 독자적인 경지에서 설파한 것이다.
거량은 당시의 여러 선승들과 선지(禪旨)를 문답한 것으로, 당대의 고승 금봉(錦峯), 수월(水月), 혜봉(慧峰), 한암(漢巖), 보월(寶月), 성월(性月), 효봉(曉峰), 혜암(惠庵), 금오(金烏), 벽초(碧超) 등과의 선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선문답은 禪을 닦는 후학들의 공부를 점검하는데 좋은 지침이 된다. 그리고 이들 문답을 통해 근대의 선사 중에서 격외의 선지를 가장 자유롭게 구사한 만공선사의 면모를 잘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게송 57수는 경허선사영찬을 비롯하여 달마영찬(達磨影讚), 때와 곳에 따라서 심경을 읊은 것, 법제자와 충가승려 및 재가신도에게 준시(時)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타 3편은 참선곡(參禪曲), 화두(話頭)드는 법, 훈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참선곡은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지만 참선하는 한 가지 일만은 진실하다는 것을 밝히고 참선하는 법, 정진하는 법, 중이 되는 법, 화두 잡는 법 등을 조리있게 제시하고 있다.

만공 월면선사
유교법회 개최

<自 影 讚>

  • 我不離汝 汝不離我
    汝我未生前 未審是​甚
  • 나는 너를 여의지 않았고 너는 나를 여의지 않았다.
    너와 내가 나기 이전에는 이 무엇인가!!